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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공예품대전 어제 오늘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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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criticism
칼럼,만평,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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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 도예가(청범) 이재삼의 관련잡지 기고글,투고,칼럼 위주로 싣고 있으나.. 언론사의 대표적 칼럼중에서 사회적 공감이 큰 관련 만평도 곁들여 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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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상생활에서 만일 “공기”가 없다면 어떨까, 우리는 한시도 생활할 수 없다.
생명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산위에 올랐을 때 희박한 공기로 호흡이 힘들거나 얼마전 우리나라를 휩쓸어간 “콘파스”의 위력같은 태풍 등을 제외하면 우리는 공기의 고마움을 알기는커녕 존재마저 의식(意識)하지 못한체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 일상에서 한시도 없어서는 안되고 둘려 쌓여있는 <공예품>속에서 편리한 삶을 영위하여 오면서도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인간이 만든 어느 것 하나라도 공예품이 아닌게 없는 사회임에도 애써 외면하거나 푸대접받는걸까. 주변에서 너무 흔하게 구하며 값도 저렴한 탓이 아닐까.
2)
1960~70년대를 넘어오면서 너무 힘들었다. 자유와 민주라는 왜침아래 가난과 피곤한 삶을 끌고 갈 것인가. 솔직히 당시 북한은 우리보다 삶은 더 넉넉했다고 듣기도 했다. “잘 살아보세~”의 구호와 노래가 흘려 다니는 속에서 핏기가신 나는 무얼 생각하고 어떤 방향(Vision)을 지향하려했는가,
민족분단과 상잔(相殘)의 전화(戰禍)를 딛고 역경가운데 미술대를 지원한 나는 산업미술을 전공으로 택하였다. 가난한 나라-, 유독 우리나라만이 유일한 분단국의 설음과 대치(對峙)로 내일이 캄캄한 걸 헤쳐나가려 몸부림치는걸까,
산업과 미술, 공예미술의 국내외 상품화 보급으로 내일을 밝게 열자고 다짐하였으니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뜻과 상통되었다.
같은 시기에 대학에서 미술교육을 지도하면서도 고답(高踏)적인 일품공예나 미술품보다 공예상품, 즉 관광민예품의 질적(質的)향상과 쓰임새(기능(機能)에 힘을 기울여 탄생된 한국디자인포장센터와 제1회 전국관광민예품 경진대회에 내심 큰 박수를 보내고 참여의 기회를 기다렸다. 디자인포장센터 현관에 내걸린 대통령의 <미술수출>이란 휘호에 감명을 받았다,
공예미술과 순수미술은 같은 맥락이면서도 차이는 많다,
공공(公共)성, 다량성, 저렴성으로 누구든 값싸고 손쉽게 공유하여야된다는 사명을 공예(민예포함)는 지니고 오로지 미의 본질만을 추구하려는 희소성, 유일무이(唯一無二))여야된다는 미술가의 우월감으로 상하(上下)의 개념이 생겨 왔다. 때문에 같은 미술계 교수사이에서도 소외당하며 산학협동이라는 미명(美名)으로 중소기업체나 대중, 고객(Client)들과 빈번히 접촉하여 세속(世俗)적으로 어울리며 격(格)을 깎아내린다고도 들었다.
나는 성신여대 박물관장을 지냈다. 몇군데 고문,자문위원을 역임하면서 전국에 열린 박물관 행사를 참관하기도 하였는데 대회와 참여 대학박물관장들은 한결같이 역사나 인문계열로서 미술전공인 나를 의아(疑訝)하게 바라보는 거였다. 그런 속에서 우리직원들과 합심해서 처음으로 <대학박물관문화상품전>을 과감히 개최하였다. 열린박물관이 세속화라해도 좋다, 깊숙이 소장하고 있는 귀한 천문계 골동품,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김기창과 박래현부부, 천경자등 저명화가의 작품을 도자기, 조명등, 우산, 넥타이, 손수건등의 일상용품으로 복사, 디자인화시켜 제품화하고 널리 소개하였다, 대단한 반응이었다, 아니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영국의 대영제국박물관 소장품들은 벌써부터 국제적인 넷트 망(網)으로 대단한 수입까지 창출하지 않는가, 우리도 안방에 앉아서 전세계박물관 기념상품에 주문낼 수 있다,
고답적으로 너무 깊숙한 골방에 쌓아두고만 있을 일이 아니다. 우리 대학박물관에서라도 앞장서 서민, 대중들에게 다가가서 귀중한 소장품들의 복제(Imitation)라해도 저렴히 보급하여 홍보까지 겻드린다는 기획을 미쳐 몰랐을 것이다.
업계와 학계-, 전통과 현대, 창작과 민예- 연구소와 기업,묘한 대각선(對角線)으로 물과 기름처럼 따로 돌아가던 현상을 부인한 사람이 없으리라. 여기에 국내파와 해외파, 학교라는 파벌까지도 미묘한 관계를 형성하여왔었다.
선진유럽 각국에선 1930년대에 이미 <디자인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다>며 대중생활 깊숙이 자리를 잡았음에도 우리에겐 80년대까지만해도 디자인이란 어휘가 생소(生疎)할 정도였으니 그런 면에서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40년을 맞는 대한민국공예품대전의 험난한 도정(道程)이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고 국민들의 생활을 알게 모르게 고양(高揚)시켰다는 사실을-. 기다리자 KOREA Made강국되는 날을-.
물론 대한민국 공예대전,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등 공공(公共)전과 민전으로서의 동아공예대전, 서울시 공예대전, 산미협회전, 1973년창립의 한국공예가협회전, 한국디자이너협의회(KDC)전, 전국 각 시도(市道) 공예디자인공모전등이 연면(連綿)히 이어져 온다 용두사미(龍頭蛇尾)된 단체와 전국행사도 많다,
3)
뜻있는 공예,산업인들과 의기 투합하여 오랫동안 문화관광부를 움직이고 드디여 산하기관으로서 (재)한국공예문화진흥원을 설립하여 전국에 산재한 영세 공방, 공예품 제작업체와 사업자의 구심점을 잡는 계기도 40년에 걸친 공예 즉 관광민예품 경진대회가 모체(母體)였기 때문이라고도 믿는다. 나는 미국로스엔젤레스에서의 전통혼례문화전, 몽골 울란바토르에서의 한국전통과 민예순회전, 그리고 이탈리아 밀라노에서의 마체프(Macef)상품전에 우리 영세관련업체를 대거 초대참여시킨 업적도 마땅히 기록되어야한다고 본다,
사족(蛇足)이라면 문광부 산하 초대 기관장으로서 5년여에 걸쳐 5대 주무장관을 뫼신 나로서는 얼마전(2010년-) 한국공예디자인진흥원으로 개명되고 발족한 사실에 유감이 있다, 조령모개(朝令暮改)에 적잖은 설왕설래(說往說來)가 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공예디자인, 산업 기관에서 참여해주신 분들- 고(故)유강렬, 권순형(예술원 원장), 이신자, 고(故)황종구, 민철홍, 박대순, 봉상균, (언론인)예용해, 남상교, 최승천, 고(故)이종석, 김성수, 권명광(홍대 총장), 한길홍, 신찬균(언론인), 이부웅, 김덕겸, 박형철, 곽대웅, 송번수, 정대유, 이칠용(전통칠협회대표)... 심사위원님들이 나도 같은 위원에 입장에서 눈안에 아른거린다. 이미 작고하신 분들과 년로하여 활동을 접으신 원로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4)
에피소드도 많다,
강원도 춘천의 지역예선 심사중에서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 문옥배전무와 아주 작은 우리 검정콩들로 열쇠고리, 장신구를 만들어 출품한걸 발견했다 눈안에 띄여 떨어질뻔한걸 추가로 찾아내 올린적이 있다만 잊어버린체 세월이 흘렀다. 우연히 전주 공예관련인 회동에서 옆좌석에서 오가는 대화에서 들어났다,
하찮은 작은“콩”들의 출품뿐인데 좋은 아이디어상품으로 선택되어 젊은 여인이 자금을 지원받고 도(道)사업지원금으로 세운 기업공장이 성공, 매우 성업중이라는 거다,
제주도 지방대회심사에서 제주에서 출품한 여인은 훗날 우도(牛島)에 조촐한 공예전문상품관을 자문받고 직접 짓고 운영하여 초대방문해 격려하기도 했다 연약한 여성들의 손길에서 피여난 성공담이다.
5)
첫해인 1971년대와 강산이 4번이나 변함직한 작금, 바뀐 명칭같이 우리의 공예문화산업실정과 관광공예품대전은 어디에 있고 어데로 가야 할까,
한국의 기적(奇績)으로 향후 기록되어질 것인가,
흔히 <세계속의 한국>과 “한류”를 논한다. 일찍이 <한국미술 5000년전>이 일본 옛 수도인 경도(京都)에서 열린 적이 있다.
전 일본이 놀랐다. 한국에 이런 훌륭하고 역사가 깊은 유물과 공예문화가 있었는가라고-. 일본의 역사를 다시 기록하고 교과서도 새로 써야된다는 매스컴의 평가였다. 일본속에 한국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동경(東京)전시 뒤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스미소니언박물관을 비롯하여 각지를 순회하면서 마찬가지 놀란 반응이었으니 조상들의 수공예,민예의 솜씨와 아릿다움이 세계를 흔들어놓은 사실이었다,
1965년도 국제 기능올림픽 한국위원회에서 주최한 첫기능대회에 나도 금은세공 출제 및 심사위원으로서 참여하였다 알다싶히 그이래 우리 젊은 선수들은 지금껏 연승(連勝),연패(連覇)함으로서 역시 손재주와 두뇌의 명석함을 빛내주었다. 부존자원은 없으나 조상의 슬기와 빛나는 전통, 아이디어와 디자인, 타고난 노력이 있다, 그리고 나는 기틀을 마련한 고(故)박정희대통령에게 감사를 드린다,
오늘, 한민족의 정기(精氣)가 흐르는 금수강산을 사랑한다,
22년간에 걸쳐 매주 일요일이 오면 꼭 오르는 산-, 신선한 공기와 참신(斬新)한 공예감각을 새삼 누리기위해, 활력을 불어넣는 피톤 치트가 샘솟는 산에 오른다,
일망(一望)무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넘친다.
소박하고 무심(無心)한 공예문화와 더불어 한평생을 보내듯이 천혜(天惠)의 공기를 반려자로서 요산요수(樂山樂水)하련다.
40년 전통임에 무슨 평가가 필요하랴, 앞으로 KOREA Made가 세계속에 으뜸대열에 서게되는 날까지 무한변신할 것임을 믿고 축하를 보낸다.
장윤우 (전 한국공예문화진흥원이사장, 성신여대 명예교수)
[출처] 세계속에 기록되는 “KOREA Made”로의 견인차. 인용- 장윤우|작성자 쟝브론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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