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혼성모조 도시로서 서울

거대한 혼성모조 도시로서 서울
◆◆◆◆◆거대한 혼성모조 도시로서 서울◆◆◆◆◆

환경조형물은 도시공간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서울이란 거대도시를

떠올리면 무엇보다 먼저 착종(entanglement)과 혼성(Hybrid)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달리 말

하자면 서울을 서울답게 만드는 정체성이 없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착종되고 혼

성된 도시적 풍경이 서울을 규정하는 용어인지도 모른다. 부산하고 혼란스러우며 통일성을

결여한 서울의 풍경은 활력과 변화, 넘쳐나는 볼거리를 지닌 도시란 긍정적 측면도 지니고

있는 한편,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를 짧은 기간 안에 재건함으로써 급조된 도시에서 흔히

나타나는 전통의 단절, 정체성의 상실, 도시문화의 실종이란 부정적 측면도 노출하고 있다.

착종과 혼성이란 사실 서울에만 국한된 특징이 아니다. 뉴욕에서든, 도쿄에서든, 베이징에

서든 산업화 현상과 함께 팽창된 도시에서 그것을 느낄 때가 많다. 하루가 다르게 불쑥불

쑥 솟아오르는 기이한 빌딩의 밀림을 헤매는 아주 미미한 존재로서 나는 원주민이 아니라

갑자기 낯선 땅에 불시착한 이방인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져들 때가 있다. 누구나 그러

하듯이 비행기가 이륙하거나 착륙할 때 무심하게 좁은 창을 통해 서울풍경을 쳐다보곤 하

는 버릇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이 광활한 대지를 점령하고 있는 아파트 군락 속에 작은 점

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이 한없이 왜소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던 비

행기가 관악산을 지나치면서 펼쳐지는 회색 콘크리트의 위용은 나를 질식하게 만든다. 서

울에는 왜 이렇게 녹지공간이 없는 것일까. 간혹 외국인들을 안내하는 기회에 서울에 대한

인상을 물어볼 경우가 있다. 그들의 반응이란 게 대개 나무가 너무 없다, 도시적 특징이 없

다, 전통과 현대가 혼재해 있어 혼란스러우면서도 재미있다 등등이었는데 물론 그들의 인

상이 서울을 설명할 수 있는 충분한 척도가 될 수 없을지언정 참고할만한 지적이라고 생각

한다. 그 중에서 가장 가슴아픈 말은 역시 서울을 특징짓는 도시적 개성을 결여하고 있다

는 지적일 것이다. 현대그룹의 권위적이고 중앙집권적인 본사사옥에 의해 가려진 원서동이

나 가회동의 한옥들을 볼 때면 근대화 프로젝트에 의해 무참하게 잘려나간 우리의 산하와

운명을 같이 한 서울의 불안정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고급 소비 상업문화의 메카와

도 같은 청담동 일대의 온갖 외형으로 치장한 상업건물은 기능성과 효용성, 경제성과 개발

이란 이름 아래 획일적으로 팽창해온 서울의 빈곤한 거죽을 화사하면서도 현란하게 은폐하

고자 하는 가련하고 가망 없는 노력들을 새삼 드러내는 것 같아 우울하다. 건물의 외벽마

다 빈틈없이 달라붙어 아우성치는 무수한 간판들의 외침들은 환경조형물에 대해 짐짓 걱정

하는 우리들을 조소하는 것만 같다. 평범하고 지리멸렬한 주문주택 사이를 비집고 불쑥 튀

어나온 미니멀한 건물의 부조화는 차라리 평범 속의 파격이며, 갑자기 신고전주의 풍으로

되돌아가 버린 듯한 백화점의 외장은 소비에 대한 부드러운 유혹일 수 있다. 포스트 모던

이란 용어가 느닷없이 넘쳐나는 문화담론으로서 활발하게 논의되던 과정에서 서울의 건물

들도 각기 우중충하고 멋도, 특징도 없던 성냥갑 모양으로부터 기이하고 재미있는 외형으

로 바뀌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혼성의 적나라한 모델이자 그 증거물이란 점에서 나는 혼란

과 함께 재미를 느낀다. 제6공화국때 완공된 청와대로부터 직선으로 연결되는 대로에 서있

는 정부종합청사, 교보빌딩, 삼성 본관, 상공회의소 등의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건물이 있는

가 하면 헐리우드의 싸구려 공포영화에나 나올법한 을씨년스러운 고성(古城)을 모조한 듯한

카페,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한때 성업하였던 신사동의 중국성이란 정체불명의 건물, 한쪽

에서는 일제식민잔재의 청산이란 고귀한 명분 아래 서양 고전건축의 외형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총독부 청사가 해체되고, 다른 쪽에서는 향수를 달래듯 그것의 외장만 모방한 상업건

물이 신축되거나 리노베이션을 통해 문화적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는 위장된 형태로 출현한

다. 중앙집권을 상징하는 건물들로부터 개성이 없으면 존재의미가 없다는 신세대의 강박증

을 실천한 듯한 신축건물들을 보노라면 서울은 그 혼성을 특징으로 하는 '특징 없는 도시'

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통일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해서 서울이 지닌 또 다른 재미를 폄하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서울의 팽창과 부조화의 양산이 도시문화의 빈곤을 초래하였으나

도시문화에 대해, 살 맛 나는 도시환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 또한 활발해지고 있으므

로 거시적 차원에서의 환경공학에서뿐만 아니라 미시적 맥락에서의 도시환경 조성이란 시

민적 요구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장치의 마련을 기대해 본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 기

대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여전히 녹지공간이 부족하다. 경제개발과 함께 하늘 높은 줄 모르

고 치솟았던 지가(地價)에 짓눌려 도시가 숨쉴 수 있는 최소한의 녹지공간까지 양보해야 했

던 서울을 살아있는 도시로 만들기 위해 환경조형물에 우선하여 현실적으로 공간확보의 어

려움이 많지만 보다 더 많은 녹지공간의 확보가 시급하다는 것이 필자가 가지고 있는 기본

적인 생각이다. 환경조형물의 실태를 조사하고 그것을 슬라이드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극단적으로는 건물 앞에 조각품을 세울 돈으로 나무 몇 그루 더 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서울지역 환경조형물의 현황◆◆◆◆◆

환경조형물에 대한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논의는 분분했지만 정작 서울지역 환경조형물의

현황에 대한 정확한 자료의 수집과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점은 필자 역시 마찬

가지인데 사실 한 개인이 도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경우에 따라 꼭꼭 숨어있는 환경

조형물의 현황을 파악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지만 지난 1993년에 당시 문화체

육부가 집계한 전국 환경조형물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전국환경조형물 현황(1993.9.30 현재)[7]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
총계

71-83

2
2

4
2

8
1

19

84
11
1

13

85
11
1
1

1

14

86
8
2
3

1
1

1

16

87
108
6
5

1
2
1

1

1

125

88
63
16
10
1
4

3
1
1

1

1
1
5
107

89
92
27
19

4
1
4
1
1
2
2

4
157

90
152
48
13
5
8
1
11
2
3
5
4
2
4
2
17
277

91
192
48
38
6
9
32
37
1
1
1
4

9
23
4
405

92
189
38
50
24
18
22
61

2
2
1
1
13
1
422

93
127
15
44
18
4
33
21
1

1
5
1

4
2
276

총계
953
204
185
54
47
89
138
9
12
13
21
4
25
44
33
1831

이 도표에 의하자면 1987년 이전까지 지역마다 거의 간헐적으로 설치되었던 환경조형물

이 1987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무엇보다 88서울올림픽

을 준비하면서 정부가 주도적으로 환경조형물 설치를 종용한 결과임에 분명할 것이다. 또

한 지방자치제의 실시와 함께 각 지역마다 조형물 설치빈도가 상승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물론 이 통계가 1993년 전반기까지 설치된 조형물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1980년대 초반

부터 1992년까지 환경조형물 제작에 참가한 작가명단을 보면 총 2백 59명 가운데 10점 이

상을 제작한 작가들로서 10건이 백현옥·김영중, 11건이 김찬식·김창희(동명이인의 구별 없

음)·유용환·김인겸·박동희, 12건이 한계원·임동락·엄태정, 13건이 강대철, 15건이 신석필,

16건 최국병, 19건 이일호, 23건 최기원 등 15명에 이른다.[8] 문제가 이 지경이라면 특

정 작가들이 주요 환경조형물을 '독식'해 왔다는 의구심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

다. 여기에 덧붙여 93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제작된 조형물을 포함한다면 이 순위에 포함될

작가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환경조형물에 대한 논란이 일어날 때마다 작가나 건축주의 양심, 제도적 장치의 결

함에 대한 논의는 많았으나 정작 환경조형물이란 이름 아래 도시공간 속에 덩치만 키워 심

어놓은 이 '미술관미술품'들의 형식분석을 통한 문제점의 도출은 언제나 포기되었다. 그래

서 '환경조형물'이란 이름 아래 몇 개의 유형으로 고착된 이 작품들의 '빈곤한 형식언어'에

대한 본격적 논의의 필요성 또한 주변환경과의 조화, 제도의 개선 못지 않게 중요함을 인

식하여야 할 것이다.

이 유형을 보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부부·가족의 사랑과 화합이며 대체로 이

런 종류의 작품은 인체를 단순화하거나 패턴화해 놓은 것이 특징이며 휴머니즘으로 치장한

감상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기업이 의뢰하여 제작된 조형물의 경우 번영, 성장, 비상(飛翔)

등의 주제를 내세운 것이 많은데 일면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

표현양식 또한 진부하고 천편일률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현대주의의 단순이식에 가까

운 작품들이 거의 위압적으로 특정공간을 점유하며 현대미술의 위용을 과시하는 작품도 상

당수에 이른다. 문제는 대체로 이런 작품들이 놓여진 건축물과 그 공간의 현대성을 강조하

는 말 그대로 '장식물'의 차원으로 머물러 있다는 데 있다. 게다가 화단으로 밀려나 작품이

조경의 일부가 되어버렸거나 나무에 가려있는가 하면 건물의 모퉁이에 왜소하고 옹졸하게

방치돼 있는 경우도 많아 환경조각에 대한 의지보다 준공검사를 위한 요식 절차로 주변공

간의 장소적, 문화적 맥락과는 상관없이 대충 조형물을 서둘러 세워놓은 것임을 단박에 알

수 있는 것도 허다하다. 따라서 한번 설치하고 나면 금방 잊혀져버리는가 하면 영원히 그

장소에 고착된 채 무관심과 관리소홀 등으로 지리멸렬한 흉물이 되어 오히려 도시미관을

헤치는 방치물에 대한 현황조사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벨의 철거시비 못

지 않게 현재 서울 시내에 공공성과 상관없이 마구잡이 식으로 설치된 많은 환경조형물 중

에서 아마벨 보다 더 고약하고 수준 이하인 작품을 솎아내어 논의에 부치는 작업이 필요하

다.